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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건축가?/구조와 재료

오귀스트 페레는 거푸집을 뜯은 다음에 망치를 들었다

by aclstoryji 2026. 9. 16.

오귀스트 페레는 거푸집을 뜯은 콘크리트 면을 망치로 다시 두들겨 골재를 드러내고 그대로 마감으로 삼았다. 예산이 없어 정직해진 랭시 노트르담 성당의 얇은 기둥, 르코르뷔지에와 갈라선 창 논쟁, 일흔에 맡은 르아브르 재건까지 그가 내린 판단을 하나씩 따라 읽는다.

매끈하게 나온 콘크리트 면을 일부러 깨뜨려 속의 자갈을 드러낸 공정에 대하여.

먼저 알아둘 세 가지
  • 르코르뷔지에가 스물한 살에 배운 철근콘크리트는 이 사람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 랭시 성당의 벽이 색유리로 가득한 이유는 미학이 아니라 예산이었다.
  • 르아브르 시민들은 자기 도시를 오래 싫어했다. 세계유산이 된 것은 그다음 일이다.
랭시 노트르담 성당 내부 스케치
여행 계획 — 지도 번호와 같은 순서다

잘 나온 면을 왜 깨뜨렸을까?

거푸집을 뜯으면 매끈한 면이 나온다. 잘된 공사다. 오귀스트 페레는 그 잘된 면에 망치를 댔다.

끌이 촘촘히 박힌 망치로 표면을 두들겨 시멘트 피막을 털어냈다. 안쪽의 자갈과 모래가 드러났다. 석공이 돌 표면을 거칠게 다듬던 부샤르다주라는 공정을, 굳은 콘크리트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이었다.

이 공정이 바꾼 것은 이렇게 정리된다.

- 색을 칠하지 않는다. 섞어 넣은 자갈의 색이 그대로 벽의 색이 된다.
- 벗겨질 껍질이 없다. 페인트도 미장도 얹지 않았으니 떨어질 것이 없다.
- 골조가 곧 마감이 된다. 기둥을 가리는 층이 사라진다.

손이 닿는 높이의 재질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마지막 항목이 제일 크게 보인다. 실내에서 가장 먼저 상하는 곳은 늘 마감재다. 걸레받이가 들뜨고 도장이 벗겨지는 것은 그것이 구조 위에 얹힌 별개의 층이기 때문이다. 페레는 그 층을 아예 만들지 않는 쪽을 택했다.

다만 콘크리트가 돌이 된 것은 아니다. 두들긴 면은 돌처럼 보일 뿐이고, 물성은 그대로다. 그는 콘크리트를 감추지 않으려고 콘크리트를 때렸다.
나는 감추려 했을 것 같다. 고급스러운 대리석처럼 보이려 갈고 닦았을 거다.

바닥에서 올려다본 르아브르 생조제프 성당의 팔각 탑 내부와 색유리 격자

도면과 견적서를 같은 사람이 썼다

그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졸업장을 받지 않고 나왔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집안의 공사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페레 프레르는 형제가 함께 꾸리던 건설 회사였고, 그는 설계자이면서 시공자였다.

당시 건축가 사회에서 이것은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시공은 한 급 아래로 여겨졌고, 그는 자주 그 이유로 낮춰 보였다. 그러나 콘크리트라는 재료에서는 그 겸업이 결정적이었다. 배합을 정하고 거푸집을 짜고 양생을 지키는 사람이 곧 형태를 정하는 사람이었다.

1904년 파리 프랭클린가 25번지의 아파트에서 그는 철근콘크리트 골조를 파사드 바깥으로 드러냈다. 골조 사이 패널에는 알렉상드르 비고의 도기 타일을 붙였다. 골조는 보이고 채움은 덮는 방식이다. 이어 1906년 퐁티외 거리의 차고에서는 덮는 것마저 거의 없앴다. 그 건물은 1970년에 철거되어 지금은 없다.

1913년의 샹젤리제 극장은 사정이 복잡하다. 앙리 반 데 벨데의 안으로 시작해 페레 형제가 공사를 맡으면서 설계가 크게 바뀌었다. 누구의 건물인가를 두고 오래 다투었고, 지금도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는 콘크리트를 감추지 않으려고 콘크리트를 때렸다.
두들겨 마감한 콘크리트 기둥이 줄지어 선 이에나 궁전 다주실

돈이 없어서 정직해진 성당

1923년 파리 동쪽 랭시에 완성된 노트르담 성당은 가난한 교구의 건물이었다. 예산이 거의 없었다.

석재를 입힐 돈이 없으니 콘크리트를 그대로 두었다. 기둥은 지름이 채 50센티미터가 안 되게 가늘고, 거푸집이 남긴 세로 골이 표면에 그대로 남았다. 벽은 벽이 아니라 구멍 뚫린 콘크리트 블록을 쌓아 만든 격자다. 그 구멍마다 마르그리트 위레의 색유리가 끼워졌다.

사람들은 이 건물을 콘크리트의 생트샤펠이라 불렀다. 중세 성당이 수십 년에 걸쳐 돌을 깎아 얻은 벽면의 해체를, 페레는 돈이 없어서 일 년 남짓에 얻었다.

사진으로만 보면 이 실내는 완결돼 보인다. 그런데 벽 전체가 유리인 건물이 겨울에 따뜻할 리 없다. 난방을 감당하기 어려운 교구였고, 지금도 그 성당은 추운 건물로 알려져 있다. 아름다움과 편안함이 늘 같은 편은 아니다.

창문 하나로 제자와 갈라섰다

1908년부터 1년 남짓, 스물한 살의 샤를에두아르 잔레가 그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훗날 르코르뷔지에가 되는 사람이다. 철근콘크리트를 그는 여기서 배웠다.

두 사람은 나중에 창을 두고 갈라섰다. 르코르뷔지에는 가로로 길게 뻗은 띠창을 밀었다. 골조가 하중을 받으니 벽은 자유롭고, 창은 벽을 가로질러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논리였다.

페레는 세로창을 고집했다. 사람은 서 있는 존재이므로 창도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로로 긴 창은 하늘과 발밑을 한 번에 주지만, 가로로 누운 창은 가운데 띠 하나만 준다고 그는 말했다.

20세기는 띠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그의 반론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받치는 것을 감추는 자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말이 그가 남긴 문장으로 전해진다. 창 논쟁도 결국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무엇을 보이게 둘 것인가.

일흔에 도시 하나를 받았다

1944년 9월, 르아브르 도심은 폭격으로 사라졌다. 수만 명이 집을 잃었다. 이듬해 그 재건의 총괄이 일흔이 넘은 페레에게 맡겨졌다.

그는 도시 전체에 6.24미터 격자를 깔았다. 기둥 간격이 도로 폭과 주거동 폭과 창의 위치를 함께 정했다. 파괴된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에서 그가 가장 먼저 정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치수였다.

시민들의 반응은 오래 나빴다. 차갑다, 병영 같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자기가 살던 도시가 콘크리트 격자로 돌아온 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 세대가 걸렸다.

그는 1954년에 죽었다. 도시의 중심에 선 생조제프 성당의 107미터 탑은 1957년에야 완성됐으니 그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르아브르 도심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덧붙이자면 이 도시는 지금도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다. 파리에서 두 시간이 걸리고, 대개는 옆으로 지나쳐 옹플뢰르로 간다. 나 역시 가보지 못했다. 사진으로만 본 도시를 두고 다 아는 척할 생각은 없다.

감추지 않는 쪽을 고른 사람

페레가 모든 논쟁에서 옳았던 것은 아니다. 띠창은 이겼고, 그가 지킨 고전적 비례는 곧 낡은 것으로 취급됐다. 르아브르는 반세기 동안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일관되게 지킨 것은 취향이 아니라 하나의 규칙이었다. 받치는 것을 가리지 않는다. 골조를 덮을 돈이 있든 없든, 성당이든 아파트든 같았다. 랭시에서는 가난이 그 규칙을 도왔고, 이에나 궁전에서는 예산이 넉넉했는데도 같은 선택을 했다.

르아브르의 아파트 벽을 지금 손으로 만지면, 1950년대에 누군가 망치로 두들겨 놓은 자갈이 그대로 만져진다.

쉬어가는 퀴즈

페레와 르코르뷔지에가 끝내 갈라선 쟁점은 무엇이었나?

  • 가. 창을 세로로 낼 것인가 가로로 낼 것인가
  • 나. 지붕을 평지붕으로 할 것인가 경사지붕으로 할 것인가
  • 다. 철근콘크리트를 쓸 것인가 철골을 쓸 것인가
정답 확인

정답: 가. 페레는 사람이 서 있으므로 창도 서 있어야 한다며 세로창을 고집했고, 르코르뷔지에는 벽을 가로지르는 띠창을 밀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부샤르다주가 무엇인가?

끌이 촘촘히 박힌 망치로 표면을 두들겨 시멘트 피막을 털어내고 안쪽 골재를 드러내는 마감 공정이다. 원래 석재를 다듬는 기법이었는데 페레가 콘크리트에 적용했다. 물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고 표면의 질감과 색이 달라진다.

랭시 노트르담 성당은 왜 유명한가?

벽을 구멍 뚫린 콘크리트 블록의 격자로 만들고 그 구멍마다 색유리를 끼웠기 때문이다. 콘크리트의 생트샤펠이라 불린다. 이런 구성이 나온 직접적인 이유는 미학이 아니라 예산 부족이었다.

르코르뷔지에와 페레는 어떤 관계인가?

1908년부터 1년 남짓 르코르뷔지에가 페레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철근콘크리트를 거기서 배웠다. 나중에 두 사람은 창을 가로로 낼 것인가 세로로 낼 것인가를 두고 갈라섰다.

르아브르는 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나?

1944년 폭격으로 사라진 도심을 페레의 지휘 아래 6.24미터 격자로 다시 세운 사례 전체가 2005년 세계유산에 올랐다. 개별 건물이 아니라 재건된 도심 구역이 등재 대상이다.

참고문헌

  1. Karla Britton, Auguste Perret, Phaidon, 2001
  2. Joseph Abram, Auguste Perret, Infolio, 2010
  3.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Le Havre, the City Rebuilt by Auguste Perret, 2005
  4. Christophe Laurent 외, Auguste Perret: Anthologie des écrits, conférences et entretiens, Le Moniteur, 2006

글쓴이

실내건축과를 졸업했고, 현재 대한민국의 발전소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공간과 재료를 실무 현장의 눈으로 보며, 발전 설비·플랜트의 기능성과 구조·안전의 관점에서 건축을 읽는다. 또한 여행과 건축 답사를 좋아하지만, 경제적 여건 탓에 자주 떠나지는 못한다. 대신 사진과 도면, 기록을 오래 들여다보고, 직접 가 본 곳에서는 현장에서 느낀 공간 경험을 글에 녹이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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