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플랜은 그의 것이었지만, 사람들이 지금 올려다보는 첨탑은 다른 손에서 나왔다.
- 그라운드 제로의 마스터플랜을 그린 사람과,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첨탑을 설계한 사람은 서로 다르다.
-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정원의 기둥 마흔아홉 개 중, 딱 하나에만 다른 도시의 흙이 채워져 있다.
- 그는 스무 해 가까이 건물을 한 채도 짓지 못한 채, 손풍금을 켜던 이력만 남은 이론가였다.
Photo by Ishmael Orendain / CC BY 2.0 / Wikimedia Commons
기울어진 기둥, 흙을 채운 뿌리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유배의 정원' 사진을 보면, 나는 기둥보다 먼저 뿌리를 본다. 마흔아홉 개의 콘크리트 기둥이 전부 수직에서 벗어나 서 있고, 그 위에는 참나무가 한 그루씩 자란다. 기둥 안에는 흙이 채워져 있다 — 마흔여덟 개는 베를린의 흙, 딱 하나만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흙이다.
사진으로 보면, 이 기둥들 사이에서는 방향 감각이 흔들릴 것 같다. 실제로 이 정원을 걸은 방문자들 다수가 어지럼증을 느꼈다는 후기를 남겼다. 기둥이 정확히 몇 도 기울어져 있는지는 자료마다 적힌 숫자가 달라, 여기서 하나로 단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수직에서 벗어난 기둥이 흙과 나무의 무게까지 오래 견디려면, 기초와 철근 배치를 수직 기둥보다 더 세심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Photo by Raimond Spekking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손풍금을 켜던 아이
리베스킨트는 원래 건축가가 아니라 손풍금을 켜는 아이였다. 폴란드 우치에서 태어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고, 십대 초반에 이스라엘로, 다시 뉴욕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아코디언 장학생으로 무대에 섰다. 어릴 때 손끝으로 익힌 게 건반이 아니라 주름상자였다는 사실이, 나는 그의 도면을 볼 때마다 떠오른다. 손풍금은 접었다 펼 때마다 안의 공기가 소리를 만든다. 그의 평면도 접힌 자리마다 공간이 벌어진다.
음악을 완전히 놓은 뒤 쿠퍼 유니언에서 존 헤이덕 밑에 건축을 배웠다. 졸업 후에도 그는 실무보다 이론과 드로잉 쪽에 오래 머물렀다. 「챔버 워크」 같은 초기 드로잉 연작은 지어질 계획이 애초에 없는, 종이 위에서만 성립하는 건축이었다. 선과 면이 악보처럼 겹쳐 있고, 그걸 실제 콘크리트로 옮길 시공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후 거의 스무 해 가까이, 그는 건물을 한 채도 짓지 못했다. 대학에서 이론을 가르치고 전시를 열며 이름을 알렸을 뿐이다. 그의 도면은 미술관 벽에 걸렸지 콘크리트로 서지 않았다.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무모한 결정이었는데,
지금도 그 나무들은 자란다.
Photo by Sarbjit Bahga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찢어진 별, 빈 방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은 1989년 설계공모에서 당선됐고, 2001년에 문을 열었다. 평면은 압축되고 뒤틀린 다윗의 별 모양이다. 리베스킨트는 베를린에 살았던 유대인과 독일인 예술가·지식인의 주소를 지도 위에 표시하고, 그 점들을 잇는 선을 지그재그로 압축했다. 번개 모양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정작 그 선은 실재했던 주소들을 잇는 궤적이었다.
건물 안에는 접근할 수 없는 빈 방들이 수직으로 뚫려 있다. 관람 동선은 그 빈 방을 피해 돌아가게 짜여 있어서, 방문객은 정작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채 벽 너머로 그 존재만 느낀다. 그중 하나인 홀로코스트 타워에 들어서면, 난방도 없는 맨 콘크리트 벽 사이로 좁은 빛 한 줄기만 위에서 떨어진다. 이 좁은 빛줄기 하나가 타워 안의 유일한 빛이다. 관람객들이 이 안에서 목소리를 낮춘다는 방문기가 여럿 남아 있는데, 조명보다는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 때문일 것이다.
Photo by – Wladyslaw [Disk.]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이겼지만 밀려났다
2003년, 리베스킨트는 그라운드 제로 재개발 마스터플랜 공모에서 우승했다. '메모리 파운데이션'이라 이름 붙인 이 안에는 1776피트 높이의 첨탑이 있었다. 독립선언의 해를 딴 숫자였다. 지하로 파낸 자리를 그대로 드러내 추모 공간으로 쓰자는 발상, 건물 배치가 자유의 여신상을 향해 열리는 축선도 그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에 올라간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설계한 건 데이비드 차일즈였다. 개발사는 리베스킨트를 마스터플래너로 남겨두는 대신, 타워 설계는 다른 회사에 맡겼다. 두 사람의 안이 부딪히는 과정은 당시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됐다. 결국 첨탑의 상징적인 높이 숫자만 겨우 살아남았다. 자기 손으로 그린 스카이라인에서, 정작 가장 높은 건물은 다른 사람의 도면으로 올라갔다. 리베스킨트는 자기 마스터플랜에서 쫓겨났다.
Photo by Photograph by Mike Peel (www.mikepeel.net).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파편이라는 서명
이후 그가 지은 건물들은 하나같이 파편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 덴버 미술관 해밀턴관 — 티타늄 판을 각지게 접어 올린 증축동
-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크리스탈관 — 기존 석조 건물을 뚫고 들어간 유리·금속 결정체
-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노스 — 지구가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는 설정으로 지은 세 개의 파편 건물
같은 언어를 도시마다 반복하는 게 서명인지, 아니면 매번 같은 답을 꺼내 쓰는 것인지는 나도 확신이 없다.
발전소에서도 같은 설비 모듈을 여러 부지에 반복해 쓰면 공사비는 줄지만, 그 땅의 조건을 덜 보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리베스킨트의 파편들도 도시마다 각도만 바뀐 채 같은 몸짓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크리스탈관은 완공 이후 누수와 전시 공간의 동선 문제로 여러 차례 언론에 오르내렸다. 기존 석조 건물을 뚫고 들어간 결정체 모양은 사진으로는 강렬하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전시를 운영하는 쪽에서는 불만이 나왔다는 뜻이다.
흙을 채운 이유
발전소에서 나는 배관 하나를 수직에서 3도만 기울여도 응력 계산을 다시 돌린다. 기울어진 채로 오래 버티는 구조물은, 처음부터 그 기울기를 계산에 넣고 지어진 것이다. 우연히 삐뚤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다. 리베스킨트는 기둥 마흔아홉 개를 통째로 기울이고, 그 안에 흙을 채워 나무를 심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이름만 남기고 밀려났지만, 베를린의 이 정원은 온전히 그의 것으로 남았다.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무모한 결정이었는데, 지금도 그 나무들은 자란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그라운드 제로 건물을 직접 설계했나?
마스터플랜만 그의 것이다. 실제로 올라간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데이비드 차일즈가 설계했고, 리베스킨트가 제안한 1776피트라는 상징적 높이만 남았다.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의 정원 기둥에 왜 흙을 채웠나?
마흔아홉 개 기둥 중 마흔여덟 개에는 베를린의 흙을, 하나에는 예루살렘의 흙을 채웠다. 그 위에서 참나무가 자란다.
참고문헌
- Daniel Libeskind, Breaking Ground: An Immigrant's Journey from Poland to Ground Zero, Riverhead Books, 2004
- Bernhard Schneider, Daniel Libeskind: Jewish Museum Berlin, Prestel, 1999
- Jewish Museum Berlin 공식 자료, Libeskind Building 설계 개념 소개(보이드·유배의 정원·전시축)
- Lower Manhattan Development Corporation, World Trade Center Site Memorial 마스터플랜 공모 공식 기록, 2003
- Imperial War Museum North 공식 자료, 건물 설계 개념 소개(지구·파편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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