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전차 사고를 당한 가우디를 택시 몇 대가 태우기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 가우디가 전차 사고를 당했을 때, 택시 몇 대는 그를 태우지 않았다.
- 그가 평생 매달린 성당은 아직도 완공되지 않았다.
- 구엘 공원은 원래 팔기 위해 지은 땅이었다.
이 글의 순서
택시 기사들은 그를 태우지 않았다
1926년 6월 7일, 바르셀로나의 한 전차가 노인 한 명을 치었다. 지나가던 택시 몇 대가 그를 태우기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옷차림이 남루해 요금을 못 받을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으로 옮겨졌고, 사흘 뒤 그곳에서 죽었다. 이름은 안토니 가우디였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믿기지 않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설계한 사람이, 정작 그 성당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길바닥에서 신원 확인도 못 받은 채 방치됐다는 게.
말년의 가우디는 실제로 그렇게 입고 다녔다. 정장을 벗고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지냈고, 머리도 손질하지 않았다. 성당 부지 안 작업장에서 먹고 자다시피 하며 40년 넘게 이 건물 하나에 매달렸다.
바보한테 준 건지 천재한테 준 건지
가우디는 1852년 카탈루냐 레우스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인근 마을 Riudoms(리우돔스? 뭐라고 잃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ㅋ) 출생설도 있어, 정확한 출생지는 지금도 완전히 합의되지 않았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학장이던 엘리에스 로헨트가 졸업장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가 이 졸업장을 바보한테 준 건지 천재한테 준 건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정확한 원문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여러 전기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일화다.
가우디의 첫 대형 작업은 카사 비센스였다. 타일 공장을 운영하던 의뢰인을 위해 지은 집인데, 외벽 전체를 타일로 덮었다. 의뢰인의 사업과 재료를 그대로 연결한 선택이다.
그를 치고 간 전차 노선은 지금도 그 성당 앞을 지난다.
Photo by Bernard Gagnon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가우디의 구엘 공원은 원래 부동산이었다
1900년, 사업가 에우세비 구엘은 영국식 전원도시를 본떠 고급 주택단지를 계획했다. 부지를 60구획으로 나누고 가우디에게 설계를 맡겼다.
결과는 실패였다. 팔린 땅은 단 두 구획뿐이었다. 그중 하나를 가우디 본인이 사서 1906년부터 1925년까지 거기 살았다 — 정작 그 집을 설계한 건 그의 조수 프란세스크 베렝게르였다.
구엘의 상속자들은 결국 이 땅을 바르셀로나 시에 팔았다. 시는 1926년 이곳을 공원으로 열었다. 안 팔린 주택단지가, 팔렸다면 그러지 못했을 만큼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게 된 셈이다.
Photo by Bernard Gagnon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매달아 놓은 자루가 기둥이 됐다
콜로니아 구엘 성당 지하 예배당을 설계할 때, 가우디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그 끝에 작은 자루를 매달았다. 자루 안에는 산탄을 채웠다. 실이 늘어지는 곡선, 그것이 순수한 인장력만 받는 형태다.
이 형태를 사진으로 찍어 뒤집으면, 인장이 아니라 압축만 받는 기둥과 아치의 형태가 나온다. 재료를 낭비하지 않고 힘의 방향에 맞춰 기울어진 기둥들이 그렇게 나왔다. 발전 설비에서 배관 지지대의 하중 경로를 계산할 때 쓰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 힘이 흐르는 길을 먼저 찾고, 그 길을 따라 구조를 앉힌다.
이 예배당은 끝내 완공되지 못했다. 1914년 공사가 멈췄고, 지하 부분만 남았다. 그런데 그 지하 부분이 오히려 사그라다 파밀리아 기둥 설계의 원형이 됐다.
Photo by Diliff / CC BY 2.5 / Wikimedia Commons깨진 타일로 용의 등을 만들다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는 가우디의 후기 대표작이다. 카사 바트요의 지붕은 비늘 같은 타일로 덮여 있는데, 사람들은 이걸 용의 등이라고 부른다.
이 타일 마감에는 트렌카디스라는 이름이 있다. 깨진 도자기나 유리 조각을 모자이크처럼 붙이는 방식이다. 공장에서 나온 불량품이나 파손품을 싸게 구해 썼다는 설명도 있고, 곡면에는 온전한 타일보다 깨진 조각이 더 잘 붙는다는 실용적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카사 밀라는 이보다 더 극단적이다. 사진으로 보면 벽도, 창틀도, 발코니 난간의 철제 장식도 물결친다.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지만, 완공 당시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이 건물을 채석장이라고 조롱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성당
가우디는 1883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맡았다. 죽을 때까지 43년, 이 성당 하나만 붙들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공사는 채 4분의 1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유네스코는 가우디의 건물 7곳을 세계유산으로 묶어 등재했다. - 구엘 공원 - 구엘 저택 - 카사 밀라 - 카사 비센스 -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 파사드와 지하 납골당 - 카사 바트요 - 콜로니아 구엘 성당 지하 예배당 한 사람의 작업이 도시 하나의 유산 목록을 이 정도로 채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성당은 정부 지원 없이 기부금과 관람료만으로 지어지고 있다. 한때 2026년, 가우디 사망 100주기를 완공 목표로 내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정확히 어디까지 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가우디는 이 성당 지하 납골당에 묻혔다. 자신이 설계한 유네스코 세계유산 건물 안에 묻힌 건축가는 흔치 않다. 그를 치고 간 전차 노선은 지금도 그 성당 앞을 지난다.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맡기 시작한 해는?
- 가. 1878년
- 나. 1883년
- 다. 1900년
정답 확인
정답: 나. 1878년은 건축학교를 졸업한 해고, 1883년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맡았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가우디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다. 1852년 레우스에서 태어났고 1926년 바르셀로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왜 아직도 짓고 있나?
정부 지원 없이 기부금과 관람료만으로 공사비를 충당해서다. 가우디가 맡은 1883년부터 지금까지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가우디는 어떻게 죽었나?
1926년 6월 바르셀로나에서 전차에 치였다. 옷차림이 남루해 병원으로 옮겨지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지며, 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구엘 공원은 원래 공원으로 지어졌나?
아니다. 원래는 60구획짜리 고급 주택단지로 계획됐다. 팔린 땅이 두 구획뿐이라 실패했고, 이후 바르셀로나 시가 사들여 공원으로 열었다.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의 차이는?
둘 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가우디의 후기작이다. 카사 바트요는 비늘 같은 타일 지붕으로 용을 연상시키고, 카사 밀라는 건물 전체에 직선이 거의 없는 물결치는 외관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 Works of Antoni Gaudí, UNESCO World Heritage List 공식 등재 문서, 1984/2005
-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설위원회(Junta Constructora) 웹사이트, 공사 진행 현황 페이지
- Rainer Zerbst, Antoni Gaudí, Taschen
- 카탈루냐 공과대학(UPC) 가우디 강좌(Càtedra Gaudí) 연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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