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바와는 변호사로 일하다 서른 무렵 정글이 된 농장을 사들였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야 닿는 스리랑카 국회의사당, 바위에 몸을 숨긴 칸달라마 호텔, 평생 손보던 정원 루눈가나를 통해 그가 땅을 읽는 방식을 차례로 따라간다.
- 제프리 바와는 마흔이 다 되도록 건물을 한 채도 설계하지 않았다.
- 스리랑카 국회의사당은 정치인들이 매일 다리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자리에 있다.
- 칸달라마 호텔은 완공 당시 환경 단체의 반대 속에 문을 열었다.
이 글의 순서


정글이 된 땅을 그대로 샀다
1948년, 제프리 바와는 벤토타 강 옆에 오래 방치된 고무나무와 계피 농장을 보러 갔다. 관리를 그만둔 지 오래라 나무 사이로 덤불이 제멋대로 자라 있었을 것이다. 그는 별다른 계획 없이 이 땅을 사들였다.
당시 그는 건축가가 아니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런던에서 법정 변호사 자격을 딴 뒤 콜롬보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무엇을 지을지도 정하지 않은 채 계약부터 한 셈이다. 이 땅은 훗날 루누강가로 불리게 됐고, 남은 생애 내내 이 정원을 고쳤다.

변호사 자격증 다음에는 건축 자격증이었다
루누강가를 사들이고도 몇 해가 지나서야 그는 건축을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탈리아식 정원을 흉내 내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탓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런던으로 돌아가 AA 스쿨에 들어갔고, 1957년 서른여덟에 졸업했다.
이 대목에서 솔직히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 나는 실내건축을 전공하고도 발전소 일을 하며 밥벌이와 설계 감각을 따로 챙겨야 했는데, 그는 변호사로 몇 해를 보내고도 마흔이 되기 전에 다시 시작해 10대 근대주의를 만든 사람이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세상이 늘 공평하게 기회를 나눠주는 건 아니다.
AA 스쿨을 졸업한 뒤 그는 에드워즈, 리드 앤드 베그 사무소에 합류했다. 이 회사 이름은 지금도 스리랑카 건축 역사에서 그의 초기작들과 함께 언급된다.
정치의 자리를 물로 둘러싼 셈이다.

국회의사당인데 다리를 건너야 한다
1982년에 완공된 스리랑카 국회의사당은 원래 습지였던 땅에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위에 섬처럼 앉혔다. 코테 지역의 저수지를 넓혀 만든 호수라, 이 건물은 다리를 건너야 닿을 수 있다. 정치의 자리를 물로 둘러싼 셈이다.
지붕은 캔디 왕조 시대 사원 지붕에서 형태를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겹으로 층을 이룬 동판 지붕이 물 위에서 반사되는 사진을 보면, 서구식 의회 건물의 격식보다는 스리랑카 자신의 건축 언어를 택했다는 인상을 준다.
국회의사당이 다른 열대 근대주의 건물과 갈라지는 지점은 이렇게 정리된다.
- 콘크리트 골조를 감추지 않으면서도 캔디 지붕의 실루엣을 살렸다.
- 호수를 경계이자 냉각 장치로 동시에 썼다.
- 내부 동선을 의전용과 실무용으로 나눴다.
바위에 짓겠다고 하자 반대가 시작됐다
1990년대 초, 담불라 인근에 칸달라마 호텔을 짓겠다는 계획이 나오자 환경 단체와 인근 사원 쪽에서 거세게 반대했다. 담불라 석굴 사원과 시기리야 바위 요새 가까이에 대형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은 반가울 리 없었다. 공사는 여러 해 동안 법정 다툼과 시위에 시달렸다.
바와가 내놓은 답은 건물을 숨기는 것이었다. 호텔 몸체는 바위 능선을 따라 길게 눕혔고, 골조 일부는 암반에 그대로 박아 고정했다. 발전 설비를 기초 암반에 앵커로 고정할 때와 비슷한 발상이다. 지붕에는 흙을 얹어 식물이 자라도록 했다.
완공되고 몇 해가 지나 담쟁이와 이끼가 노출 콘크리트를 덮으면서, 이 건물은 오히려 환경 친화적 리조트 건축의 본보기로 자주 인용되는 쪽으로 평판이 바뀌었다. 나는 이 반전이 온전히 정직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식물이 뒤덮을 것을 계산에 넣고 설계했다면 그건 계획된 결과지 우연한 화해가 아니다.
나무를 몇 번이나 다시 옮겼는지는 아무도 세지 않았다
루누강가에서 그는 정원을 손보는 일을 마흔 해 넘게 그만두지 않았다. 큰 나무 한 그루를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을 때까지 몇 차례고 옮겨 심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 자란 나무를 옮기는 일은 뿌리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부터가 큰 공사인데, 그 수고를 감수했다는 뜻이다.
실내건축을 공부한 눈으로 보면 루눈가나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풍경보다 문턱이다. 방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문턱 높이를 낮추고, 처마를 길게 빼 실내와 실외 사이에 그늘진 완충지대를 뒀다. 비가 많은 지역에서 문턱 하나의 높이는 장식이 아니라 유지관리의 문제다. 낮으면 빗물이 들이칠 위험이 커지고, 그만큼 배수와 방수를 더 신경 써야 한다.
콜롬보의 자택 넘버 11, 33번가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원래 있던 작은 방갈로 네 채를 수십 년에 걸쳐 하나씩 사들이고 벽을 터서 연결했다. 콜롬보의 베이라 호수에 지은 시마 말라카 수계당도 마찬가지다 — 기존 목조 건물이 상한 자리에 세 개의 정자를 다리로 이어 다시 지었다.
말을 잃은 뒤에도 그는 현장에 갔다
1998년, 바와는 뇌졸중으로 말과 글을 거의 잃었다. 그래도 공사 현장 방문을 멈추지는 않았다. 휠체어에 앉은 채 도면 대신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2001년 아가 칸 건축상은 그에게 회장상을 수여했다. 변호사로 일하다 마흔이 다 되어 건축을 시작한 사람에게 주어진 상이 었다. 그는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루누강가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40년 가까이 고쳐 온 정원이 결국 그가 돌아간 자리가 됐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제프리 바와는 원래 무슨 일을 했나?
런던에서 법정 변호사 자격을 딴 뒤 콜롬보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건축은 서른 무렵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해 1957년 서른여덟에 자격을 땄다.
칸달라마 호텔은 왜 논란이 됐나?
담불라 석굴 사원과 시기리야 인근의 생태 민감 지역에 대형 리조트가 들어선다는 이유로 환경 단체와 사찰 쪽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지붕과 벽면에 식물이 덮이면서 평판이 달라졌다.
루누강가는 어디에 있나?
스리랑카 남서부 벤토타 인근, 데도와 호수 옆에 있다. 바와가 1948년에 사들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을 본 정원이다.
참고문헌
- David Robson, Geoffrey Bawa: The Complete Works, Thames & Hudson, 2002
- Brian Brace Taylor, Geoffrey Bawa, Concept Media, 1986
- Geoffrey Bawa, Christoph Bon, Dominic Sansoni, Channa Daswatte, Lunuganga, Times Editions, 1990
- The Aga Khan Award for Architecture, 2001 Chairman's Award citation
- Geoffrey Bawa Trust(Lunuganga Trust) 공식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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