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선을 고집한 사람과, 그 곡선을 계산한 사람과, 그 곡선 밑에서 일한 사람들이 각자 다른 몫으로 남았다.
- 니마이어가 유엔 본부에 낸 32번안은 최종 배치를 결정지었지만,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더 크게 남았다.
- 브라질리아의 도시 배치와 건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
- 그가 평생 지지한 정당의 건물을, 그는 다른 나라에서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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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이 필요 없던 견습생
1936년 리우데자네이루, 교육보건부 청사 설계팀에 스물여덟 청년 니마이어가 있었다. 팀장은 루시우 코스타였고, 자문으로 파리에서 온 르 코르뷔지에가 두 달간 함께 일했다.
코르뷔지에가 스케치를 남기고 떠난 뒤 안을 완성하고 다듬은 것은 코스타를 비롯한 브라질 팀이었다. 니마이어는 여기서 처음 자기 곡률을 시도했다. 필로티 사이로 흘러드는 차양의 곡선을 스승의 직각 문법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정했다.
이 건물은 훗날 근대건축이 열대기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 첫 사례로 꼽힌다.
Photo by Cayambe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뉴욕에, 그의 안이 있었다
1947년 뉴욕, 유엔 본부 설계를 위한 국제 자문단이 꾸려졌다. 브라질 대표로 참여한 니마이어는 32번 안을 냈다. 사무국 건물을 대지 남쪽으로 돌려세우고 총회장을 별도 볼륨으로 분리한 배치는 다른 위원들의 호평을 받았다.
최종안은 그의 32번 안과 르 코르뷔지에의 23번 안을 절충한 형태로 결정됐다. 그런데 준공 이후 이 건물을 소개하는 자료 대부분은 르 코르뷔지에의 이름 아래 실렸다.
현장에서도 최종 도면에 이름이 남는 사람과, 그 도면의 결정적인 한 줄을 그은 사람이 다를 때가 있다.
건축이 한 사람의 재능으로 서 있다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 이런 이름이 있다.
Photo by Eurico Zimbres / CC BY-SA 2.5 / Wikimedia Commons두 손이 그린 도시
1956년 브라질 대통령 주셀리누 쿠비체크는 새 수도 브라질리아를 5년 안에 짓겠다고 선언했다. 도시의 전체 배치, 비행기 모양의 축과 광장 배열을 그린 것은 루시우 코스타였다. 그가 공모전에서 낸 '파일럿 플랜'이 채택됐고, 니마이어는 그 위에 들어설 대통령궁·국회의사당·대성당을 맡았다.
두 이름이 자주 뒤섞여 불리지만, 도시의 틀을 그은 손과 건물을 세운 손은 달랐다.
공사는 41개월 만에 끝났다. 그 속도를 만든 것은 '칸당구'라 불린 이주노동자 수만 명이었다. 대부분 브라질 북동부에서 온 이들은 임시 막사에 살며 일했다. 처우에 항의하는 소요가 있었고, 진압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완공 기념식에 니마이어의 이름은 크게 걸렸지만, 그 밑을 다진 사람들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Photo by Donatas Dabravolskas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곡선을 지킨 건 계산이었다
1970년 완공된 브라질리아 대성당은 콘크리트 기둥 16개가 위로 갈수록 벌어지며 왕관 모양을 이룬다. 각 기둥은 90톤에 가까운 무게로 미리 제작된 뒤 세워졌다.
이 곡선을 구조로 성립시킨 사람은 니마이어가 아니라 구조기술자 조아킴 카르도주였다. 그는 1943년 팜 풀랴 단지 때부터 니마이어의 거의 모든 주요작에서 계산을 맡았다.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곡선의 미학과 곡선의 하중을 동시에 다뤘다.
건축이 한 사람의 재능으로 서 있다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 이런 이름이 있다.
Photo by Jakub Hałun / CC BY 4.0 / Wikimedia Commons공산당원의 여권
니마이어는 1945년 브라질 공산당에 입당해 평생 당적을 유지했다. 1950년대 냉전 시기 미국은 그에게 비자를 제한적으로만 내줬고, 유엔 본부 설계가 진행되던 시기에도 그는 뉴욕 체류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4년 브라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새 정부는 그의 사무실을 감시했고 일감은 줄었다. 1967년 그는 파리로 근거지를 옮겨 알제리 콩스탕틴 대학, 프랑스 공산당 본부 청사 같은 작업을 이어갔다.
자신이 평생 지지한 정당의 건물을,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지은 것이다. 군사정권이 끝난 1985년에야 그는 브라질로 돌아왔다.
104세까지 그린 도면
니마이어는 190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나 2012년 104세로 그 도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기 몇 해 전까지도 매주 사무실에 나가 도면을 그렸다.
그는 곡선에 대한 애착을 자주 말로 남겼다. 산과 강과 구름의 곡선,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몸이 그리는 곡선에 끌린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그의 감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의 몸을 설계의 재료처럼 다뤘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다만 그 도면에 없던 손들이, 그 곡선을 지금까지 서 있게 했다.
브라질리아의 주요 시설이 완공되기까지 걸린 공사 기간은?
- 가. 약 41개월
- 나. 약 10년
- 다. 약 6개월
정답 확인
정답: 가. 1956년 착공해 1960년 개통식까지 41개월 만에 주요 시설을 마쳤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오스카르 니마이어는 브라질리아를 혼자 설계했나?
아니다. 도시 전체 배치인 파일럿 플랜은 루시우 코스타가 설계 공모전에서 제안한 안이며, 니마이어는 그 위에 들어설 대통령궁·국회의사당·대성당 등 주요 공공건물을 맡았다. 두 사람의 역할은 구분된다.
유엔 본부 설계에서 니마이어의 역할은 무엇이었나?
브라질 대표로 국제 설계 자문단에 참여해 32번 안을 냈다. 사무국 건물의 배치를 정리한 이 안은 최종 설계에 영향을 줬지만, 완공 이후 소개 자료 다수는 르 코르뷔지에의 이름을 중심으로 다뤘다.
브라질리아 대성당의 곡선은 누가 계산했나?
구조기술자 조아킴 카르도주가 계산했다. 그는 1943년 팜 풀랴 단지부터 니마이어의 주요 작업 대부분에서 구조 계산을 맡은 인물이며, 시인이기도 했다.
니마이어는 왜 한동안 브라질을 떠나 있었나?
1945년부터 공산당원이었던 그는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국내에서 일감이 줄고 감시를 받았다. 1967년 파리로 근거지를 옮겨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작업했고, 군사정권이 끝난 1985년에 브라질로 돌아왔다.
브라질리아 건설 노동자들은 어떤 조건에서 일했나?
'칸당구'라 불린 이주노동자 수만 명이 임시 막사에서 지내며 41개월의 짧은 공사 기간을 채웠다. 처우에 항의하는 소요가 있었고 진압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참고문헌
- Styliane Philippou, 『Oscar Niemeyer: Curves of Irreverence』, Yale University Press, 2008
- Oscar Niemeyer, 『As Curvas do Tempo: Memórias』, Editora Revan, 1998
- James Holston, 『The Modernist City: An Anthropological Critique of Brasíli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 George A. Dudley, 『A Workshop for Peace: Designing the United Nations Headquarters』, MIT Press, 1994
-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Brasília」(등재번호 445), 1987
- Fundação Oscar Niemeyer(리우데자네이루), 도면·자료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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