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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건축가?/근대건축의 기초

요제 플레치니크는 청혼 편지에 건축과 결혼했다고 답했다

by aclstoryji 2026. 8. 2.

빈에서 배우고 프라하에서 일하고 류블랴나로 돌아온 사람이, 어느 유파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기만의 기둥을 세웠다.

먼저 알아둘 세 가지
  • 요제 플레치니크는 스승 오토 바그너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 프라하 성에 세운 오벨리스크는 운반 도중 두 동강이 났다.
  • 그가 세운 성당의 기둥 하나는 콘크리트 하수관이다.
검은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어두운 계단을 오르면 밝은 열람실이 나오는 류블랴나 국립대학도서관 내부

 

여행 계획 — 지도 번호와 같은 순서다

청혼 편지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 여성이 편지로 요제 플레치니크에게 청혼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이미 건축과 결혼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몇백 년 전 일화도 아니고 20세기 사람인데 이런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다.

출처를 딱 짚어 확인하기는 어려운 일화다. 그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이 정도로 일에만 파묻혀 산 사람이었을까? 확인되는 사실은 하나뿐이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요제 플레치니크는 1872년 류블랴나에서 목공소를 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나무를 만지며 자란 시간이 훗날 그의 건축에 그대로 남는다.

콘크리트 하수관에 기하학무늬를 칠해 만든 성 미카엘 성당의 기둥 네 개

빈에서 배우고,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그라츠의 공업학교에서 가구 짜는 법을 배운 뒤 빈으로 갔다. 가구 회사에서 일하다 오토 바그너에게 도면을 들고 찾아갔고, 바그너의 화실에 들어가 빈 아카데미 건축과를 수석으로 마쳤다. 아돌프 로스는 그를 두고 무엇을 받아 가든 천 배로 돌려줄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스승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오토 바그너가 근대건축으로 나아갈 때, 플레치니크는 고전 기둥과 민속 장식을 자기 방식으로 섞었다. 어느 사조에 넣기도 애매한 건축이 그렇게 나왔다.

빈에서 자리를 잡아 갈 무렵인 1911년, 그는 프라하 응용미술학교의 교수 자리를 받아들여 떠났다. 유파를 하나 골라 그 안에 있었다면 얻었을 이름값을 그는 계속 미뤄 둔 셈이다.

가난한 재료로 지었다고 가난해 보이는 건물은 아니다.
가운데 돌다리 양옆으로 비스듬한 보행자 다리 두 개가 부채꼴로 덧붙은 류블랴나의 삼중 다리

화강암 덩어리가 운반 중에 쪼개졌다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가 그에게 프라하 성의 개조를 맡겼다. 정원과 계단, 안뜰을 14년에 걸쳐 손봤다.

그중 하나가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오벨리스크였다. 브라코틴 채석장에서 길이 34미터짜리 화강암 원석이 나왔다는 소식에 마사리크와 플레치니크 둘 다 들떴다고 한다. 그런데 1928년, 그 돌을 옮기던 중 두 동강이 났다. 남은 조각만 추려 16미터 높이로 세웠다.

설계도 순탄치 않았다. 조각가 슈투르사가 맡은 도상을 두고 비평가 카렐 타이게가 날을 세웠고, 완성된 프라하 성 오벨리스크는 4년 가까이 방치됐다. 이름난 건축가가 대통령의 후원을 받아도 돌은 쪼개지고 평은 갈린다.

늪 위에 세운 성당은 하수관으로 기둥을 세웠다

류블랴나 남쪽 츠르나 바스는 습지였다. 1937년, 플레치니크는 이 늪 위에 성 미카엘 성당을 세우기로 했다. 참나무 말뚝 350개를 진흙 속에 박아 기초를 다졌다.

재료도 있는 대로 썼다. 기부받은 목재와 근처 채석장 돌을 쓰다가, 벽 안쪽 빈 곳은 콘크리트 하수관으로 채웠다. 네 개의 기둥도 하수관이다. 표면에는 기하학무늬를 칠해 숨겼다.

하수관을 기둥으로 세우는 발상은 발전 설비 현장에서 자재를 이것저것 돌려 쓰는 감각과 닮았다. 종탑은 본채와 떨어뜨려 따로 세우고 아치를 뚫어 무게를 덜었다. 가난한 재료로 지었다고 가난해 보이는 건물은 아니다.

검은 계단을 오르면 밝아진다

류블랴나 국립대학도서관은 1941년에 완공됐다. 입구는 낮고 평범한데, 계단실에 들어서면 검은 포드페치 대리석 기둥 서른두 개가 어둠 속에 늘어서 있다.

그 사이를 걸어 올라가면 위층 열람실에서 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사진으로 봤을 때 내가 떠올린 건 계단을 오를수록 한 그루씩 불이 켜지는 나무였다. 실제로 그 어둠 속을 걸어 봐야 아는 감각일 테니, 이건 사진만 보고 상상한 내 몫의 그림이다.

- 낮은 입구와 어두운 계단실로 먼저 낮춘다.
- 열람실에서 한꺼번에 밝힌다.

빛을 아끼는 건 절약이 아니라 계산이다. 실내를 만지는 사람이라면 이 계산이 얼마나 어려운 조율인지 안다. 이 도서관은 2021년 류블랴나 시내 여러 작업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그가 세상을 뜨고 예순네 해가 지난 뒤였다.

다리 하나를 셋으로 늘렸다

류블랴니차강을 가로지르던 낡은 다리 곁에, 플레치니크는 1929년부터 3년에 걸쳐 보행자용 다리 두 개를 비스듬히 더 놓았다. 다리 하나가 셋이 됐다. 지금은 트로모스토브예, 삼중 다리라고 부른다.

슬로베니아 안에서는 명예 시민, 프레셰렌상, 두 개의 명예박사 학위가 따라왔다. 국경을 넘어서는 오랫토록 조용했다. 1954년에야 영국왕립건축가협회 명예회원이 됐다.

청혼 편지에 대한 답이 사실인지 각색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확인되는 건 그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류블랴나의 다리와 계단과 성당에 자기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나였다면 분명 이름을 남겼을 거다. 길거리에 시멘트 포장을 하고 있으면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 충동과 같을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요제 플레치니크는 어느 도시와 관련이 깊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도시의 다리와 도서관, 시장을 설계했다. 빈에서 배우고 프라하 성 개조를 맡기도 했다.

류블랴나 국립대학도서관의 검은 계단은 왜 유명한가?

포드페치 대리석 기둥 서른두 개가 늘어선 어두운 계단실을 오르면 열람실에서 빛이 쏟아진다. 2021년 류블랴나의 다른 플레치니크 작업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참고문헌

  1. MGML(류블랴나 박물관·미술관), Plečnik House 공식 자료, Jože Plečnik 1872–1957
  2.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The works of Jože Plečnik in Ljubljana – Human Centred Urban Design, 2021 등재 자료
  3. Damjan Prelovšek, Jože Plečnik 1872–1957: Architectura Perennis, Yale University Press, 1997
  4. Peter Krečič, Plečnik: The Complete Works, Whitney Library of Design, 1993
  5. archiweb.cz, Church of St. Michael in the Ljubljana Marshes 자료

글쓴이

실내건축과를 졸업했고, 현재 대한민국의 발전소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공간과 재료를 실무 현장의 눈으로 보며, 발전 설비·플랜트의 기능성과 구조·안전의 관점에서 건축을 읽는다. 또한 여행과 건축 답사를 좋아하지만, 경제적 여건 탓에 자주 떠나지는 못한다. 대신 사진과 도면, 기록을 오래 들여다보고, 직접 가 본 곳에서는 현장에서 느낀 공간 경험을 글에 녹이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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