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의 첫 일본인 제자는 왜 전쟁 중에 지은 자기 집에 박공지붕을 얹었을까.
- 마에카와 구니오 저택 앞 둥근 기둥에는 전쟁이 남긴 사연이 있다.
- 르코르뷔지에의 첫 일본인 제자는 대학 졸업식 날 밤에 파리로 떠났다.
- 우에노 공원의 한 미술관은 전체 면적의 절반 넘게 땅속에 있다.
이 글의 순서


옛 일본으로 빨려 들어가는 정원
고가네이 공원 안의 에도도쿄 다테모노엔은 옛 건물을 옮겨 세운 야외 박물관이다. 문을 지나 걷다 보면 일본의 과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에카와 구니오 저택은 그 건물들 가운데 하나다.
정원에 서서 발밑 잔디부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박공지붕을 얹은 저택이 눈에 들어왔고, 고개를 조금 더 들자 지붕 위로 하늘이 이어졌다. 그 몇 초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남았다.
따져 보면 이상한 일이다. 과거로 빨려 들어간다고 느낀 그 정원에서, 그 장면의 주인공은 르코르뷔지에에게 배운 근대 건축가가 1942년에 지은 집이었다.

박공 한가운데 선 기둥은 전신주였다고 한다
집 정면 박공 한가운데에 둥근 기둥 하나가 서서 마룻대 끝을 받친다. 이세 신궁 정전의 박공을 받치는 기둥, 무나모치바시라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이다. 전시 자재 통제 때문에 이 기둥에는 전신주를 가져다 썼다고 한다.
1942년은 목조 주택의 연면적을 100제곱미터 아래로 묶던 때다. 그 작은 몸집 안에서 그는 가운데 거실을 4.5미터 높이로 틔웠다. 거실 한쪽 면은 폭 6.37미터, 바닥에서 천장까지가 통째로 창이다. 위쪽은 유리를 끼운 나무 격자, 아래쪽은 유리 미닫이와 쇼지다.
거실에 들어서면 이 창이 한쪽 면을 통째로 차지한다. 실내를 배운 사람이라 이 창을 떠올리면 겨울 걱정부터 든다. 나무집에 4.5미터짜리 유리면이면 난방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유리 미닫이 안쪽에 쇼지를 한 겹 더 둔 데는 그 이유도 있었을 거라고 짐작한다.
콘크리트 건물에 씌우라던 일본풍 지붕은 거부했고, 나무로 짓는 집에는 나무집의 지붕을 얹었을 뿐이다.

마에카와 구니오는 졸업식 날 밤 시베리아 철도에 올랐다
1928년, 그는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던 날 도쿄를 떠났다. 고베에서 배로 다롄에 건너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파리에 닿았고, 르코르뷔지에의 사무소에 들어갔다. 그 사무소에 들어간 첫 일본인이었다. 1930년에 돌아와서는 안토닌 레이먼드의 사무소에서 일했다.
1931년 도쿄제실박물관 설계 공모는 일본풍 양식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는 그 조건을 따르지 않은 근대 건축안을 냈고 떨어졌다. 그리고 「지면 역적(負ければ賊軍)」이라는 글을 썼다.
그랬던 사람이 11년 뒤 자기 집에는 박공지붕을 얹고 이세 신궁을 닮은 기둥을 세웠다. 처음엔 웃음이 났다. 다시 보면 모순까지는 아니다. 콘크리트 건물에 씌우라던 일본풍 지붕은 거부했고, 나무로 짓는 집에는 나무집의 지붕을 얹었을 뿐이다.
우에노 공원, 광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에노 공원에는 1959년 르코르뷔지에의 국립서양미술관이 섰다. 마에카와는 사카쿠라 준조, 요시자카 다카마사와 함께 이 건물의 실시설계와 감리를 맡았다. 1957년 7월 그가 도쿄문화회관 설계를 정식으로 맡았을 때, 파리에서는 서양미술관의 도면이 막 건너오던 참이었다.
도쿄문화회관은 1961년에 완공됐다. 그 앞에 서면 두꺼운 콘크리트 처마가 멀리 튀어나와 지붕 가장자리를 두른다. 스승의 미술관과 제자의 공연장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내가 갔던 날은 비가 왔다. 그 처마 끝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양이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과 사뭇 달랐다. 일본 특유의 짙은 풀 냄새도 났다.
도쿄도미술관은 절반 넘게 땅속에 있다
같은 공원 안쪽의 도쿄도미술관은 1975년에 완공됐다. 지상에서 보면 그렇게 큰 건물로 보이지 않는다. 풍치지구의 15미터 높이 제한과 공원법 때문에 건축면적은 옛 건물보다 늘릴 수 없었고, 연면적은 옛 건물 1만 7천 제곱미터의 두 배 가까운 3만 1천 제곱미터가 필요했다. 그래서 전체 면적의 60퍼센트 가까이를 땅속에 넣었다.
미술관 계단을 내려올 때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여느 가정집이 생각났다.
외벽은 벽돌처럼 보인다. 실은 타일이다. 마에카와가 다듬은 우치코미 타일이다.
- 뒷면에 다리가 달린 타일을 만든다.
- 그 타일을 거푸집 안쪽에 미리 붙인다.
- 콘크리트를 부어 타일과 벽을 한 몸으로 굳힌다.
비가 많고 습한 일본에서는 나중에 붙인 타일이 들뜨고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 발전소에서는 외벽 마감재 한 장이 떨어져도 안전사고로 기록된다. 그래서 이 공법에 자꾸 눈이 간다.
이 방식을 건물 전체에 처음 쓴 것은 1966년 우라와에 완공된 사이타마회관이다. 벽돌을 쌓은 듯한 외벽이 콘크리트와 한 몸으로 굳어 있다.
그가 고른 자리는 따로 있었다
1945년 공습으로 사무소를 잃자, 그는 이 집을 사무소로 썼다. 부부와 직원들이 그 4.5미터 거실에 모여 일했고, 1954년 새 사무소를 낼 때까지 그랬다.
1970년대 초 옛 집은 해체돼 가루이자와 별장으로 옮겨졌다. 그곳에 다시 세울 생각이었지만 1986년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계획은 멈췄다. 집은 1996년, 원래 부재로 고가네이에서 다시 섰다.
그날 잔디에서 하늘까지 고개를 들던 그 자리는 마에카와가 고른 땅이 아니다. 그가 고른 자리는 시나가와의 가미오사키였고, 그다음은 가루이자와였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마에카와 구니오 저택은 어디서 볼 수 있나?
도쿄 고가네이 공원 안의 에도도쿄 다테모노엔에 옮겨 세워져 있다. 1942년 시나가와 가미오사키에 지은 집을 해체해 보관하다가 1996년 이곳에 다시 세웠다.
우치코미 타일은 무엇인가?
뒷면에 다리가 달린 타일을 거푸집 안쪽에 미리 붙이고 콘크리트를 부어 벽과 한 몸으로 만드는 공법이다. 마에카와 구니오가 타일이 들뜨고 떨어지는 문제를 막으려고 다듬었고, 1966년 사이타마회관에서 처음 건물 전체에 썼다.
참고문헌
- 松隈洋, 『建築の前夜 前川國男論』, みすず書房, 2016
- Panasonic TAMARIE, 「すまいの文化を訪ねて 前川國男邸」
- 江戸東京たてもの園 공식 누리집, 西ゾーン 復元建造物 前川國男邸
- 東京都美術館 공식 누리집, 「新館と建築家・前川國男」
- 東京文化会館 공식 누리집, 「建築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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