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 콜하스 OMA — 램 콜하스 옆에 서 있던 사람 — 엘리아 젠겔리스는 왜 도면 밖으로 밀려났는가
OMA를 함께 세운 네 사람 중 한 명, 엘리아 젠겔리스의 이름을 도면 여백에서 다시 꺼내 읽는다.
램 콜하스 OMA(Elia Zenghelis, 1937–)는 그리스·영국을(를) 대표하는 OMA 건축가입니다. 이 글에서는 램 콜하스 OMA의 생애와 대표작, 건축 철학을 찬양·비판·의견·진실의 네 시선으로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 OMA는 램 콜하스 혼자가 아니라 네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했고, 그중 한 명이 엘리아 젠겔리스다.
- 그는 지을 수 없는 벽을 도면 위에 세우는 방식으로 도시를 논증했다.
- 이 글은 유명한 이름 뒤에 남은 공동 저자의 여백에 대한 기록이다.
Photo by OSeveno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건축 여정_건축가와 함께한 곳

잘라낸 도면 조각이 다시 돌아온 밤
실내건축과 제도실에서 나는 남의 도면을 자주 잘랐다. 칼날이 광택지를 지나갈 때 나는 소리는 짧고 건조했고, 잘린 조각은 늘 원래보다 작아 보였다. 그때는 그게 편법이라고 생각했다.
램 콜하스와 엘리아 젠겔리스가 1972년에 발표한 계획안 '엑소더스, 혹은 건축의 자발적 수용자들'을 처음 도판으로 봤을 때, 나는 그 잘린 조각들이 다시 내 앞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두 겹의 벽. 그 사이에 갇힌 띠 모양 도시. 채색은 조에 젠겔리스와 마들롱 프리센도르프의 손을 거쳤다.
정보로만 보면 이건 도시계획 응모안이다. 감각으로 보면 잘라 붙인 종이가 사람을 가두겠다고 선언한 문서다.
왜 램 콜하스 옆의 이름은 자꾸 한 칸 뒤로 밀리는가
엘리아 젠겔리스는 1937년 아테네에서 태어난 그리스 출신 건축가다. 런던 AA스쿨에서 공부하고 가르쳤으며, 콜하스는 그곳에서 그의 학생이었다. 1975년 OMA는 이 두 사람과 조에 젠겔리스, 마들롱 프리센도르프, 네 명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 OMA를 검색하면 대개 한 사람의 얼굴이 먼저 나온다. 나는 이 대목에서 부러움과 서늘함을 동시에 느낀다. 협업으로 만든 결과물에 한 사람의 이름만 남는 일을, 나는 회의실에서도 몇 번 봤다.
젠겔리스는 1980년대 후반에 OMA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정확한 시점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확인 필요). 이후 엘레니 지간테스와 함께 지간테스 젠겔리스 아키텍츠를 꾸려 작업을 이어갔다.
도면은 지을 수 있는 것만 그리지 않는다. 지을 수 없는 것을 계속 요구하는 일도 도면의 몫이다.
그림으로 세운 벽은 몇 밀리미터인가
실무에서 벽은 숫자다. 경량 철골 칸막이 하나를 세우려면 스터드 간격 450밀리미터, 석고보드 9.5밀리미터 두 겹, 러너 고정 앵커의 위치를 도면에 박아야 한다. 그 숫자가 빠지면 벽은 서지 않는다.
엑소더스의 벽에는 그 숫자가 없다. 대신 이런 것들이 있다.
- 벽 안쪽으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렬 - 구역별로 쪼개진 생활의 프로그램 - 바깥 도시가 폐허가 되어가는 배경 - 채색된 하늘, 그러나 두께 없는 단면
도면은 지을 수 있는 것만 그리지 않는다. 지을 수 없는 것을 계속 요구하는 일도 도면의 몫이다. 이 문장을 인정하는 데 나는 십몇 년이 걸렸다.
국경 검문소 옆에서 아침에 먼저 일어나는 사람
OMA는 1980년대 베를린 IBA 사업의 일환으로 체크포인트 찰리 인근에 주거 계획을 맡았고, 젠겔리스는 그 시기 OMA의 공동 파트너였다. 라 빌레트 공원 응모안 역시 OMA의 공동 작업으로 기록된다. 개인의 서명으로 나누기 어려운 작업들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 주거동은 창을 규칙적으로 끊고, 발코니 난간을 얇은 수평선으로 처리한다. 검문소가 사라진 지금은 관광객이 그 앞을 지나간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형편이 늘 허락하지는 않아 그 앞에 서지 못했다. 그래서 상상만 한다. 만약 그 계단실에 들어선다면 나는 먼저 손스침의 도장이 어디부터 벗겨졌는지를 볼 것이다. 짐작하기로는 3층 꺾이는 지점, 사람 손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부터다.
가르치는 일이 준공보다 오래 남을 때
젠겔리스의 이력에서 가장 길게 이어진 것은 교육이다. AA스쿨을 시작으로 여러 학교에서 가르쳤고, 그의 스튜디오를 지난 사람들이 이후 유럽 건축의 여러 사무소로 흩어졌다.
이건 준공 도장이 찍히지 않는 종류의 작업이다. 검사도 없고 하자보수 기간도 없다. 다만 십 년쯤 뒤에, 전혀 다른 도면에서 같은 사고방식이 튀어나온다.
품질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기록되지 않는 성과에 늘 마음이 걸린다. 문서가 없으면 증빙이 없고, 증빙이 없으면 실적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남은 것은 어느 문서 번호로도 소급되지 않는다.
결론: 램 콜하스의 이름 뒤에 엘리아 젠겔리스가 남긴 여백
정리하면 이렇다. 엘리아 젠겔리스는 1937년 아테네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배우고 가르쳤고, 1975년 램 콜하스 등과 OMA를 세웠으며, 엑소더스로 지을 수 없는 도시를 도면 위에 세웠다. 이후 OMA를 떠나 자신의 사무소와 강의실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자기 이름이 앞자리로 나오지 않는 방식으로 오래 일한 사람이다.
나는 여전히 남의 도면을 자른다. 이제는 잘린 쪽의 사람을 한 번 생각한다. 이 종이는 원래 누구의 것이었나. 이 벽은 누가 먼저 그었나. 대답은 대개 여백에 있고, 여백은 좀처럼 인쇄되지 않는다.
1975년 OMA를 함께 세운 사람은 모두 몇 명인가
- 가. 두 명
- 나. 네 명
- 다. 여섯 명
정답 확인
정답: 나. 램 콜하스, 엘리아 젠겔리스, 조에 젠겔리스, 마들롱 프리센도르프 네 명이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엘리아 젠겔리스는 램 콜하스와 어떤 관계인가?
런던 AA스쿨에서 젠겔리스가 교사, 콜하스가 학생으로 만난 관계다. 이후 1975년 두 사람은 조에 젠겔리스, 마들롱 프리센도르프와 함께 OMA를 공동 설립했다.
OMA 창립 멤버는 몇 명인가?
네 명이다. 램 콜하스, 엘리아 젠겔리스, 조에 젠겔리스, 마들롱 프리센도르프가 1975년에 함께 시작했다.
엑소더스, 혹은 건축의 자발적 수용자들은 실제로 지어졌는가?
지어지지 않았다. 1972년 발표된 계획안이자 드로잉 연작이며, 런던을 가로지르는 두 겹의 벽과 그 사이의 띠 도시를 제안한 개념 작업이다.
엘리아 젠겔리스는 OMA를 언제 떠났는가?
198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료마다 시점 서술이 조금씩 다르다. 정확한 연도는 확인이 필요하다.
엘리아 젠겔리스의 건축을 지금 어디서 볼 수 있는가?
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 인근 IBA 주거처럼 OMA 시기의 공동 작업이 남아 있다. 엑소더스 관련 드로잉은 미술관 소장 도판과 출판물을 통해 접근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참고문헌
- Rem Koolhaas, Deliriou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 Rem Koolhaas and Bruce Mau, S,M,L,XL, The Monacelli Press, 1995
- Museum of Modern Art, Exodus, or the Voluntary Prisoners of Architecture (project), collection record
- Elia Zenghelis, 이론 선집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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