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짓는 건축가?2026. 7. 14.by aclstoryji

구조가 맞고 기능이 작동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며, 그 구조와 기능이 누구를 위해 어떤 질서를 만드는지까지 물어야 한다는 건축가 "헨드릭 베를라헤"

찬양 · 비판 · 의견 · 진실의 네 시선으로 다시 읽는 건축가 에세이

헨드릭 베를라헤, 벽돌이 도시의 질서를 말하게 한 건축가

장식을 걷어낸 자리에 구조와 공동체의 언어를 세우며, 역사주의에서 근대로 건너가는 느리고 단단한 다리를 놓았다.

헨드릭 베를라헤(Hendrik Berlage, 1856–1934)는 네덜란드을(를) 대표하는 근대주의 건축가입니다. 이 글에서는 헨드릭 베를라헤의 생애와 대표작, 건축 철학을 찬양·비판·의견·진실의 네 시선으로 깊이 있게 살펴봅니다.

헨드릭 베를라헤Photo by Anonymous (photographe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건축 여정 — 고향과 대표작이 자리한 곳
암스테르담 · 네덜란드베를라헤 증권거래소 · 네덜란드데 부르흐트 · 네덜란드성 후베르투스 사냥별장 · 네덜란드쿤스트뮤지엄 덴하흐 · 네덜란드

붉은 벽돌 앞에서 멈춘 질문

비가 막 그친 뒤의 붉은 벽돌은 이상할 만큼 말이 많다. 표면에 남은 물기가 줄눈을 더 짙게 만들고, 같은 크기의 벽돌들이 서로 기대어 하나의 거대한 벽이 되는 순간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헨드릭 베를라헤의 건축을 사진으로 처음 오래 들여다보았을 때도 그랬다. 화려한 곡선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벽돌 한 장의 무게였고, 그 무게가 반복되며 공공건축의 표정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나는 발전소 현장에서 재료가 장식 이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자주 본다. 배관은 압력을 견뎌야 하고, 철골은 하중을 넘겨야 하며, 피난 동선은 위급한 순간에도 읽혀야 한다. 그래서 베를라헤의 벽을 보면 먼저 묻게 된다. 이 벽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아직 암스테르담의 그 벽 앞에 서 보지는 못했다. 여행 경비를 계산하다 계획을 접은 적도 많다. 다만 도면과 사진만으로도 그의 건축이 값비싼 외피보다 구축의 논리를 믿었다는 점은 충분히 전해진다.

Beurs van BerlagePhoto by C messier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헨드릭 베를라헤, 역사주의의 문턱을 넘다

헨드릭 페트루스 베를라헤는 1856년 2월 21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1934년 8월 12일 헤이그에서 세상을 떠난 네덜란드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이다. 그는 1875년부터 1878년까지 취리히의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그곳에 강하게 남아 있던 고트프리트 젬퍼의 재료론과 구축론을 접했다. 이후 유럽을 여행하고 실무를 거치며, 과거 양식을 그대로 복제하는 역사주의에서 점차 벗어났다. 그의 경력은 완성된 근대주의자의 직선적인 행보라기보다, 19세기의 언어를 안고 20세기의 문턱을 건넌 긴 전환에 가깝다.

베를라헤는 구조와 기능이 외관에 반영되어야 하며, 재료는 자신의 성질을 거짓 없이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장식을 없앤 기능주의자’로 묶으면 중요한 부분을 놓친다. 그는 장식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구조와 비례, 벽화와 타일, 가구가 하나의 질서 속에서 협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의 건축에는 로마네스크의 육중함, 르네상스 도시건축의 기억, 아르누보와 공예운동의 통합적 감각이 함께 남아 있다. 근대의 출발점이 언제나 과거의 완전한 삭제는 아니었다는 사실. 베를라헤가 보여주는 진실은 거기에 있다.

De BurchtPhoto by nl:gebruiker:Ellywa / CC BY-SA 3.0 / Wikimedia Commons

베를라헤 증권거래소, 구조가 표정을 만드는 법

암스테르담의 베를라헤 증권거래소는 1898년부터 1903년까지 건설되어 1903년 문을 열었다. 붉은 벽돌 벽체, 석재의 보강 요소, 철과 유리로 덮인 큰 홀은 서로 다른 재료가 맡은 역할을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낸다. 높은 시계탑 아래로 들어가면 세 개의 주요 거래 공간이 이어졌고, 사무실과 공용시설이 그 주변을 조직했다. 외관은 권위를 과시하는 고전주의 궁전이라기보다, 거대한 생산시설처럼 단단하고 반복적이다. 증권거래소라는 자본의 장소에 사회적 공동체의 이상을 담으려 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베를라헤는 훗날 이 건물이 사람들의 집회와 문화 활동을 담는 ‘민중의 궁전’이 되기를 기대했다.

현장 실무의 눈으로 보면 이 건물의 매력은 장식의 부족이 아니라 힘의 전달이 읽힌다는 데 있다. 벽은 단순한 칸막이가 아니라 공간을 지탱하고 구획하는 두꺼운 장치이며, 철골 지붕은 넓은 홀을 비우기 위한 기술적 해답이다. 다만 정직한 재료라는 표현도 조심해서 써야 한다. 모든 건축은 마감과 상징을 통해 자신을 연출한다. 베를라헤 역시 벽돌의 반복, 아치, 탑, 벽화와 문구를 치밀하게 사용했다. 그의 정직함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장식이 구조를 위장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태도에 더 가깝다.

Jachthuis Sint HubertusPhoto by P.J.L Laurens / CC BY 3.0 / Wikimedia Commons

노동조합 건물과 사냥별장 사이의 모순

1900년에 완성된 데 부르흐트는 네덜란드 다이아몬드 노동자 총연맹의 본부로 지어진 건물이며,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노동조합 건물로 알려져 있다. 절제된 벽돌 외관과 육중한 아치, 탑, 빛이 떨어지는 계단실은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존엄을 건축으로 번역한다. 내부에는 리하르트 롤란트 홀스트의 벽화가 더해져 노동과 휴식, 수면의 시간을 상징한다. 노동자를 위한 건물이 단순한 사무실을 넘어 교육과 회합, 기억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베를라헤의 사회주의적 이상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1920년에 완성된 성 후베르투스 사냥별장은 부유한 크뢸러뮐러 부부의 전원주택이었다. 베를라헤는 건물뿐 아니라 가구, 조명, 타일과 정원까지 통합하려 했고, 평면과 탑에는 성 후베르투스 전설의 상징이 스며 있다. 노동조합 본부와 대부호의 별장이 한 건축가의 대표작으로 나란히 놓이는 장면은 불편하면서도 솔직하다. 사회적 평등을 말한 건축가도 당대의 자본과 후원 체계 안에서 일했다. 더구나 발주자와의 갈등 끝에 베를라헤가 완공 전에 손을 뗐고 일부 후속 작업에 헨리 반 데 벨데가 관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곳을 온전히 한 사람의 의지가 봉합된 작품으로만 보는 것도 무리다. 이상은 도면보다 복잡한 현실과 늘 부딪힌다.

Kunstmuseum Den HaagPhoto by Choinowski / CC BY-SA 4.0 / Wikimedia Commons

도시와 미술관, 질서를 사람의 속도로

베를라헤의 관심은 개별 건물을 넘어 거리와 광장, 주거 블록의 관계로 확장되었다. 암스테르담 남부 확장계획인 플란 자위트는 1915년안이 1917년 승인되었고, 긴 가로축과 넓은 대로, 닫힌 블록, 공공공간을 하나의 도시적 구성으로 묶었다. 실제 건축은 암스테르담파 건축가들이 여러 방식으로 채웠지만, 거리와 건물과 광장을 따로 보지 않는 기본 질서는 베를라헤가 마련했다. 오늘날의 눈에는 다소 엄격하고 기념비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도시를 필지의 합이 아니라 공동생활의 틀로 본 태도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말년의 헤이그 시립미술관, 현재의 쿤스트뮤지엄 덴하흐는 1931년 착공해 베를라헤가 사망한 뒤인 1935년 완공되었다. 낮은 수평 매스와 노란 벽돌, 연속되는 전시실, 천창을 통한 자연광, 연못을 건너는 진입 동선은 거대한 예술의 신전보다 걷기 편한 문화시설에 가깝다. 사진으로 보면 특히 복도와 전시실 사이의 빛이 부드럽다. 발전소의 조명은 작업성과 안전을 위해 균질해야 하지만, 미술관의 빛은 작품을 보호하면서도 관람자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 베를라헤는 설비와 채광, 비례를 통해 그 두 요구를 함께 다루었다. 다만 콘크리트와 철의 구조 위에 벽돌을 장식적으로 둘렀다는 사실은 그의 초기 ‘재료의 정직성’이 말년에 더 복합적인 방식으로 변했음을 보여준다.

결론: 근대는 흰 벽보다 먼저 벽돌 속에서 시작되었다

헨드릭 베를라헤는 역사주의를 단번에 폐기한 혁명가도, 국제주의 양식을 완성한 순수한 기능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벽돌과 철, 구조와 장식, 개인의 의뢰와 공동체의 이상 사이에서 오래 협상한 건축가였다. 베를라헤 증권거래소의 묵직한 홀, 데 부르흐트의 노동자 회합 공간, 성 후베르투스 사냥별장의 통합 디자인, 헤이그 미술관의 낮은 빛은 그 협상의 서로 다른 결과이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매끈하지 않다. 대신 전환기의 마찰이 남아 있다.

내게 베를라헤가 남긴 핵심은 ‘정직한 재료’라는 교과서적 문장보다 더 현실적이다. 좋은 건축은 구조가 맞고 기능이 작동하는 데서 끝나지 않으며, 그 구조와 기능이 누구를 위해 어떤 질서를 만드는지까지 물어야 한다는 것. 발전설비를 볼 때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안전한가. 오래 버티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는가. 언젠가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벽돌을 손으로 가까이 볼 수 있다면, 나는 아마 화려함보다 줄눈의 깊이부터 살필 것이다. 그 작은 틈에 건축가의 이상과 현실이 함께 굳어 있을 것 같아서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헨드릭 베를라헤는 왜 네덜란드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불리는가?

헨드릭 베를라헤는 역사 양식의 복제에서 벗어나 구조, 재료, 기능, 공간의 질서를 건축 표현의 중심에 놓았다. 그의 작업은 암스테르담파, 데 스테일, 신즉물주의 등 서로 다른 네덜란드 건축 흐름이 전개될 수 있는 중간 토대를 만들었다.

베를라헤 증권거래소의 건축적 특징은 무엇인가?

베를라헤 증권거래소는 붉은 벽돌의 큰 벽면, 석재 보강부, 철과 유리 지붕, 넓은 거래 홀로 구성된다. 구조와 재료의 역할을 드러내면서도 탑과 아치, 벽화와 문구를 통해 공공성과 상징성을 함께 만든 점이 핵심이다.

헨드릭 베를라헤와 암스테르담파의 관계는 무엇인가?

베를라헤는 암스테르담파의 구성원이라기보다 그 이전 세대로서 벽돌, 공예, 도시적 통합에 관한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암스테르담파는 그의 영향을 받아 더 조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벽돌 건축으로 나아갔지만, 베를라헤 자신은 그들의 과도한 표현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성 후베르투스 사냥별장은 왜 종합예술작품으로 평가되는가?

성 후베르투스 사냥별장은 건물과 가구, 조명, 타일, 정원, 다리까지 서로 연결해 설계하려 한 프로젝트이다. 다만 발주자와의 갈등으로 베를라헤가 완공 전에 물러났고 후속 작업에 다른 설계자가 관여했으므로, 단일 작가의 완결된 작품이라는 설명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쿤스트뮤지엄 덴하흐는 언제 완공되었고 누가 설계했는가?

현재의 쿤스트뮤지엄 덴하흐는 헨드릭 베를라헤가 설계했으며 1931년부터 건설되어 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35년에 완공·개관했다. 마지막 공정은 그의 사위 E. E. 스트라서가 감독했으며, 자연광과 낮은 수평 구성, 노란 벽돌이 대표적인 특징이다.

참고문헌

  1. H. P. Berlage, Hendrik Petrus Berlage: Thoughts on Style, 1886–1909, Getty Center for the History of Art and the Humanities, 1996
  2. Pieter Singelenberg, H. P. Berlage: Idea and Style, The Quest for Modern Architecture, Haentjens Dekker & Gumbert, 1972
  3. Sergio Polano, Giovanni Fanelli, Vincent van Rossem, Hendrik Petrus Berlage: Complete Works, Phaidon Press, 2002
  4. Jan de Bruijn, Doede Hardeman, Jet van Overeem, Het gedroomde museum: Kunstmuseum Den Haag, nai010 uitgevers, 2021
  5. Beurs van Berlage, History, 공식 웹사이트,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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