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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건축가?/사회와 지역

군나르 아스플룬드, 묘지에서 굴뚝을 찾았다

by aclstoryji 2026. 7. 10.

비 오는 석양에 그 언덕을 걸었는데, 경외롭다는 말은 한참 뒤에야 떠올랐다.

먼저 알아둘 세 가지
  • 우드랜드 공동묘지는 아스플룬드 혼자 만든 곳이 아니다. 서른 살 동갑내기 둘이 함께 낸 공모안에서 시작됐다.
  • 그곳에는 화장장이 있는데, 걸어 들어오는 방향에서는 굴뚝이 잘 보이지 않는다.
  • 그는 그 화장장이 완공된 해에 죽었고, 자신이 설계한 그 묘지에 묻혔다.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Photo by Unknown author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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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굴뚝을 찾고 있었다

비가 오다 그친 저녁이었다. 우드랜드 공동묘지의 잔디 언덕 위로 석양이 구름 아래에서 낮게 들어왔고, 사람들은 우산을 접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자꾸 굴뚝을 찾고 있었다.

화장장이 있는 곳이다. 화장로는 결국 연소 설비고, 연소 설비에는 반드시 배기 경로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굴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전소에서 굴뚝은 숨기는 물건이 아니다. 높을수록 확산이 잘 되고, 멀리서 보이는 게 정상이다. 나는 굴뚝을 이정표로 보는 눈에 익어 있었다.

우드랜드 공동묘지 (Skogskyrkogården, 1940 완공) - 인공 건축물과 숲의 경계를 허문 유네스코 세계유산.  출처:  Archiweb

아름다움보다 무서움이 먼저 왔다

솔직히 말하면 그날 나는 아름다움보다 무서움을 더 크게 느꼈다. 경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사진을 정리하면서 떠올린 단어고, 현장에서 몸이 먼저 느낀 건 서늘함이었다.

한국에서 묘지는 대체로 도시 밖에 있다. 산자락이나 공원묘원, 명절에 각 잡고 찾아가는 곳이다. 사는 자리와 죽은 사람이 있는 자리 사이에 분명한 거리가 있고, 나는 그 거리에 익숙한 사람이다. 한국이라면 이런 곳을 저녁에 혼자 걸을 일이 잘 없다.

우드랜드는 다르다. 스톡홀름 지하철에 아예 이 묘지 이름을 단 역이 있고, 역에서 걸어 들어가면 바로 묘역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이 무덤 사이를 지나가고, 그날은 내 옆으로 조깅하는 사람이 지나갔다. 묘비도 낮다. 풀 위로 조금 올라온 정도라, 어디까지가 잔디밭이고 어디부터가 묘역인지 걷는 내내 헷갈렸다.

그 경계 없음이 나에게는 편안함이 아니라 서늘함이었다. 비가 와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그 경계 없음이 나에게는 편안함이 아니라 서늘함이었다.

서른 살에 묘지 공모에 당선됐다

1915년, 스톡홀름시가 새 공동묘지 설계 공모를 열었다. 당선안의 이름은 탈룸이었고, 낸 사람은 서른 살의 아스플룬드와 동갑내기 시구르드 레베렌츠였다.

그 안의 핵심은 숲을 없애지 않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 공동묘지는 축을 세우고 길을 곧게 내고 묘를 열로 맞추는 방식이 흔했다. 두 사람은 반대로 갔다. 있던 소나무 숲을 그대로 두고, 그 사이에 길과 무덤을 끼워 넣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갈라섰다. 레베렌츠는 부활의 예배당을 따로 남겼고, 이후 이 프로젝트에서 밀려났다.

묘지 안에서 아스플룬드가 처음 지은 건물은 1920년의 우드랜드 채플이다. 숲 속에 목조 지붕을 얹은 작은 예배당인데, 나무 기둥이 늘어선 포치가 앞에 붙어 있다. 사진으로 보면 집이라기보다 숲에 세운 큰 우산에 가깝다.

묘지 공모에 당선된 뒤에도 그는 다른 일을 계속했다. 1928년에 문을 연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이 대표적이다. 가운데에 원통 하나를 세우고, 그 안쪽 벽을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둘렀다. 발전소에서 원통을 보면 나는 사일로나 저장탱크를 먼저 떠올린다. 안에 무언가를 담아 두려고 만드는 형태다. 아스플룬드가 그 안에 담은 건 책이었고, 사람은 원의 한가운데에 서서 사방을 올려다보게 된다.

1930년에는 스톡홀름 박람회를 총괄했다. 유리와 가는 철골, 흰 벽. 고전 어휘로 출발한 사람이 마흔다섯에 방향을 크게 틀었고, 스웨덴에서는 이 박람회를 근대건축이 대중에게 각인된 계기로 본다. 1937년에 끝낸 예테보리 시청사 증축은 법정 건물인데도 안쪽을 목재로 부드럽게 마감했다.

스톡홀름 시립 도서관 (Stockholm Public Library, 1928 완공) - 기하학적 형태와 기능주의적 동선 설계.  출처:  Metalocus

언덕과 나무가 주인공이다

아스플룬드가 우드랜드에서 한 일 중 가장 큰 것은 건물을 세우는 쪽이 아니었다. 언덕을 남기고, 나무를 남기고, 사람이 걸어 올라가는 경사를 정한 쪽이었다.
- 회상의 언덕: 느릅나무가 둘러싼 낮은 둔덕, 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 소나무 숲: 공모 당시부터 있던 나무를 최대한 남겼다
- 묘비: 낮게 통일되어 숲의 수평선을 깨지 않는다

이런 묘지를 유지하려면 사람이 계속 붙어야 한다. 잔디를 깎고, 쓰러진 나무를 치우고, 배수로를 살핀다. 낮은 묘비는 보기에는 조용하지만 관리하는 쪽에서는 성가신 물건이다. 예초기가 하나하나 피해 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가 온 뒤였는데 어디에 물이 고여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은 발밑을 볼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은 건물이 화장장이었다

우드랜드 화장장은 1940년에 완공됐다. 아스플룬드는 그해 가을에 죽었다. 쉰다섯이었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그 묘지에 묻혔다.

화장장 앞에는 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포치가 붙어 있다. 조문객은 그 아래에서 하늘을 보며 기다리게 된다. 비를 피하는 자리이면서 하늘은 막지 않는 자리다.

굴뚝은 있었다. 돌아와서 도면과 사진을 찾아보고 알았다. 다만 방문객이 걸어 들어오는 방향에서는 건물과 지형에 가려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연소 설비를 감추는 설계다. 발전소에서라면 굳이 하지 않을 선택이고, 여기서는 그게 핵심이었을 것이다. 1994년 우드랜드 공동묘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그때는 굴뚝을 찾지 말고

그날 나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고, 솔직히는 조금 무서웠다.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 묘지 한복판에서 편안함을 느끼기까지는 아마 몇 번은 더 가봐야 할 것이다.

아스플룬드는 죽은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만들면서 산 사람이 걸어 다니게 만들었고, 그 결과 나 같은 외국인까지 그 길 위를 걷고 있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맑은 날 낮에 다시 가볼 생각이다. 그때는 굴뚝을 찾지 말고 언덕만 봐야겠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우드랜드 공동묘지는 아스플룬드 혼자 설계했나?

아니다. 1915년 공모 당선안은 아스플룬드와 시구르드 레베렌츠가 함께 낸 것이다. 두 사람은 나중에 갈라섰고 레베렌츠는 부활의 예배당을 따로 남겼다.

우드랜드 공동묘지에 어떻게 가나?

스톡홀름 지하철에 이 묘지 이름을 단 역이 있고, 역에서 걸어 들어가면 바로 묘역이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아스플룬드는 어디에 묻혔나?

자신이 설계한 우드랜드 공동묘지에 묻혔다. 마지막 작품인 화장장이 완공된 1940년 가을에 쉰다섯으로 죽었다.

참고문헌

  1. Peter Blundell Jones, Gunnar Asplund, Phaidon, 2006
  2. Stuart Wrede, The Architecture of Erik Gunnar Asplund, MIT Press, 1980
  3. 스톡홀름시, Skogskyrkogården 공식 방문 안내 및 연혁 자료

글쓴이

실내건축과를 졸업했고, 현재 대한민국의 발전소 관련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공간과 재료를 실무 현장의 눈으로 보며, 발전 설비·플랜트의 기능성과 구조·안전의 관점에서 건축을 읽는다. 또한 여행과 건축 답사를 좋아하지만, 경제적 여건 탓에 자주 떠나지는 못한다. 대신 사진과 도면, 기록을 오래 들여다보고, 직접 가 본 곳에서는 현장에서 느낀 공간 경험을 글에 녹이기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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